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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essay

46cm의 거리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에 의하면 '사람 사이의 거리'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고 한다.


밀접 거리(Intimate distance), <0.46m: 애무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깝지만 폭력을 가하거나 상처를 줄 수 있는 거리

개체 거리(Persnonal distance), <1.2m: 상대의 체취를 느낄 수 있어 친밀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불쾌감을 주고받을 수도 있는 거리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9.0m: 사무적, 일 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거리

공적 거리(Public distance), >9.0m: 공연자와 관객처럼 서로를 관찰자로 지켜보는 거리


 내 나이도 이제 서른하고도 셋, 에드워드 홀이 정의한 '사람 사이의 거리'에 어느정도 수긍을 한다. 성인이 되니 가까운 거리의 사람을 얻기가 참 힘들다. 사회생활은 시장경제체제라는 장(Field) 위해서 펼쳐지므로 필연적으로 '자본'과 '이해관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타인과의 거리를 판단하는 가장 큰 척도가 이해관계로 되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상대를 통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으려고, 바람직하게는 이득을 얻기 위해 소위 스펙(Specification)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위치나 사회적 수준으로써 상대를 판단을 한다. 그러나 문득 '나 자체를 보고 다가와주는 사람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스펙은 '나'라는 '독자성(Identity)' 또는 '개성(character)'에 속해있기에 '스펙인 것'과 '스펙이 아닌 것'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 또한 어렵다.

 나는 밀접 거리를 가지는 사람들의 판단 기준은 '쉽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안부'라는 것은 상대방이 '잘 지내는지 아닌지 물어보는 행위'이다. 안부를 통해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고 확인이 되면 그 자체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의 사람은 아마도 '가족', '애인', '지기지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친한 친구'일 것이다. 그 사람들과 나 사이에서 '이해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하지만 밀접 거리의 정의를 보면 폭력을 가하거나 상처를 줄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함께 하면서도 상처 받는 것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취미 공유? 취향 맞추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취미가 같다고 하더라도 취향이 다르면 같이 즐기가 힘들고, 취향이라는 것은 개성에 들어가기에 바꾸기 자체가 어렵다. 가령 단적인 예로, 등산이라는 취미를 가진다고 했을 때, 한 사람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좋고 다른 한사람은 빨리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좋다고 하면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때문에 혼자일 때보다 고통스러울 것이며, 상대방에게 취향을 고집한다면 고통의 수준을 넘어 지옥을 맛볼지도 모른다. 한편, 나와 부모님과는 취미가 다르고 취향도 맞지 않을 뿐더러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도 그것들이 맞지 않는게 많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제법 화목한 편이다. 아마도 그 비결은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으며 동시에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타인과의 '밀접 거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 없는 관심'이 필요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한 개체로서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그런 사람이었는지 반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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