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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essay

哲學하기






 

 나는 어릴때부터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직관적인 것을 좋아했던 나는 글을 머릿속에서 형상화하는 작업이 싫었고, 그 전에 형상화 자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책 중에서도 특히 소설을 정말 싫어했다. 그나마 비문학은 상대적으로 직관적이어서 좋아했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면 책보다는 시청각자료를 먼저 찾았다. 만화책이나 사진책, 그림책은 나에게 있어서 '책'이 아니라 '시각자료'였다. 

 직관의 정수는 수리탐구2 영역(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역사, 지리, 사회, 윤리)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수탐2를 굉장히 좋아했다. 첫번째는 재미가 있었고, 두번째는 투자대비 결과가 좋았다. 수능조차 수탐2는 120점 만점을 받았으니까. 그 연장선으로 '천체관측'이 취미가 되었으며,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는 것이 달랐기 때문에 '천체사진'으로 옮아갔다. 그리고 천체사진은 '사진'으로 확장 되었다.

 그러던 내가 언젠가부터 '왜?'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트리거는 사진이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에 물음표가 붙었다. '이 사진은 왜 예쁘지?' 그러다가 '이 사진이 주는 의미는 뭐지?'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나는 도대체 왜 이 오브제를 찍는 것인가?'라는 질문까지 도달했다. 형이하학의 탈을 쓴 사진의 본모습을 본 것이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셔터를 누르는 횟수가 줄어든다. 그렇게 사진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철학(哲學)'에서 '哲'은 '밝다', '슬기롭다', '알다'의 의미이고, 국어사전에서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 대상이 자연현상이 되면 '자연과학'이 되는 것이고 인간과 관련이 되면 '인문과학' 또는 '사회과학'이 되는 것이다. 자연과학엔 절대적인 정답, 즉 '진리'가 있다. 하지만 인문과학은 상대적이기에 '진리'라는 것이 없다. 인간이라는 대상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정답이 없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대에 따라 좋은 답과 나쁜 답이 있었다는 것이다.

 철학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낯설고 머리가 아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맞는 좋은 답을 구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철학이라는 집을 지으려다보니 첫번째로 지식이라는 재료가 턱없이 부족했고 다음으로는 그 재료들을 알맞게 가공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비로소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독서만이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남의 집을 엿보는 짜릿함을 주기도 하였다.

 늦게라도 독서의 필요성, 독서의 매력을 알게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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