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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L사당과 소년 그리고 별

 제 18호 태풍 '차바'가 지나가고 또 한 번의 비가 내린다. 오후가 되자 회색빛 구름이 흰색으로 점점 옷을 갈아입더니 이내 쪽빛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고 흰색과 흰색 사이에서 맑은 햇볕이 쏟아져내린다. 얼른 스마트 폰을 꺼내어 달의 위상 정보를 제공해주는 앱을 실행했다. 상현달 하루 전이다. 별과 만날 수 있는 달의 조건이다. 하지만 구름이 완전 걷힌 것은 아니었고 위성사진을 통해서 서쪽에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확률은 반반이다.

 저녁이 되자 전주의 밤하늘에는 구름이 거의 없었다. 물과 약간의 주전부리를 사들고 M고개를 향해 달린다. 'M'모양의 카시오페아 자리가 선루프를 통해 인사한다. 'W'가 아닌 'M'. 가을임을 알 수 있다. M고개로 가기전에 L사당에 들린다. 평소에 눈여겨 보고 있던 곳이다. M고개는 해발 900m 정도가 되는데 L사당은 해발 550m 정도가 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먼지는 해발 1,000m 아래에 있다고 알려져 있기에 많은 별지기들은 별과 높은 산에서 별을 만난다(물론 광해도 포함). 대기의 질로 보면 M고개가 L사당보다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M고개는 너무나 습해서 결로현상으로 나를 곤혹에 빠뜨리곤 한다. 열선으로 해결이 가능하지만은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L사당을 새로운 곳으로 눈독들이고 있었다. 잠깐 들른 L사당의 별하늘은 은은한 가을 은하수를 품고 있다. 대만족이다.

 L사당을 뒤로하고 M고개에 오르니 돕소니안(Dobsonian) 식으로 보이는 망원경 한대가 펼쳐져있다. 상향등을 끄고 M고개에 진입했다. 역시 나는 예의 바른 남자라며 질 낮은 자위를 하면서 주차를 했다.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엄청난 바람이 나를 반겨주었다. 거기다가 뿌연 밤하늘...... 진퇴양난의 M고개서 한 소년이 다가왔다. 돕소니안의 주인이다. 앳된 얼굴이다. 고등학생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 불현듯 한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정도의 풍속과 뿌연 대기. 이건 구름 속이다.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바로 L사당을 향해 내려갔다.

 M고개에서 조금만 내려오니 바로 은은한 가을 은하수가 보인다. 역시 구름 속이었다. 스마트 폰을 꺼내들어 아까의 소년에게 전화를 했다. L사당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했다. 아버지가 운전한 차로 왔을 것이니, 소년이 아버지에게 길을 알려드리기 쉽도록 최대한 쉽게 설명을 했다. 잘 알아들어야 할텐데...... 통화를 끝내고 이내 L사당을 향해 질주한다. 별을 향한 마음만큼 속도도 빠르다. 주차를 하고 본격적으로 망원경 설치에 들어간다. 삼각대를 놓고 적도의를 올린다. 경통을 올리고 사진기를 마운트한다. 핫슈에 레드-닷(Red-dot) 파인더를 설치하고 인터벌 릴리즈를 꽂는다. 무게 추와 망원경의 위치로 각각 적경축과 적위축의 무게 균형을 차례로 맞춘다. 극축망원경을 통해서 극축정렬을 마치고 적정 감도와 노출 속도를 찾는 중에 M고개 방향에서 차가 한 대 내려온다. 그 소년의 가족이다.

 소년의 분주한 소리를 들으며 사진기 세팅을 한다. 세팅 도중 구름이 밀려왔다. 갑자기 할 게 없어진 나는 돕소니안 식 망원경을 설치하는 그를 본다. 제법 능숙한 손놀림이다. 자주 관측을 나왔던 모양이다. 소년도 구름때문에 볼게 없어졌다. 소년에게 다가가 M고개에서 미처하지 못했단 대회를 나눈다. 소년은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한다. 본가는 군산이고, 학교는 공주. 아마 목적이 있어서 타지의 학교를 가는거겠지. 천체관측이 취미인 사람, 그것도 청소년이 망원경이라는 장비를 가지고 보는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기에 상당히 흥미가 간다. 별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때 군산에서 어떤 분(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와서 엄청 놀라웠다. 역시 유명한 형님이었어.)을 따라서 처음보기 시작했으며 함께 자주 나왔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역시나 단순히 취미를 넘어서 천문학을 전공으로 하려고 한단다. 현실적인 조언과 함께 소년의 목표를 격려해주었다. 이제 고3이 되니 아마 내년 수능 전까진 볼 수 없을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별을 보라고 한 뒤 다시 내 장비로 돌아온다. 그 소년 때문일까? 천체사진을 찍으면서 어릴 때의 내가 생각이 났다.

 지금은 외가가 대구에 있지만 그때만해도 경북 청송에 있었다. 그래서 여름방학이면 외갓집에 놀러가곤 했다. 처음 별을 본 기억은 당시 국민학교로 불렸던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인 1992년. 산골짜기 시골에서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큰 이슈였다. 그래서 밤마다 외조부모님과 이모들과 함께 올림픽을 시청했다. 심지어 잘 나오지도 않는 흑백 브라운관 TV로. 삶은 감자와 잘 익은 수박을 주전부리로 TV를 보다가 과하게 먹은 수박 덕분에 자주 화장실에 가야했다. 화장실을 가려면 마당을 거쳐서 가야만했는데, 아궁이와 가마가 있는, 그야말로 옛날 시골집이라 건물 밖에 있는 것은 당연했고 심지어 푸세식. 전기도 잘 안들어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릴때부터 깜깜함에 대한 공포가 없어서 무섭지는 않았다. (사실은 오히려 낮이 더 무서웠다. 구더기 때문에......) 해발고도가 500m 이상의 가로등도 거의 없는 시골마을의 여름밤은 나에게 여름 은하수를 선물해주었다. 쏟아지던 은하수의 신비로운 별빛에 압도당하던 그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때가 내 기억속속에 각인된 처녀관측이었다. 그 후 2년 뒤, 외조부모님이 대구로 나오시면서 더이상 수락 골짜기에 갈 일은 없어졌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다. 중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과학 써클(동아리) 활동을 하려고 알아보니 C.O.C(cosmos or chaos)라는 천체관측반이 있는게 아닌가! 어릴적 추억이 떠오르면서 엔트로피가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해가는 것 마냥 자연스럽게 C.O.C로 들어갔고 본격적인 星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목성과 토성을 보여준 동원社의 노란색 반사망원경과 장식용이었던 빅센社의 흰색 굴절 망원경은 아직 잊을 수 없다. 한편, 고2 였던 2001년 가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국 천문올림피아드가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지구과학2를 수능 선택과목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지구과학 교육과나 천문학과 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참가해보았다. 난생 처음 혼자 상경해보았고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인 서울대학교도 처음 가보았다. 하지만 천문 올림피아드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컸다. 1회였기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시험지를 받고나니 멘탈붕괴가 왔다. 아직도 선명하다. 수준은 대학교 천문학과 학부 1학년 전공 수준이었으며, 시험은 주관식이었다(나중에 알았지만 올림피아드는 과학고 친구들이 특차로 대입을 준비하는 시험이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천체관측과 천문학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 그때서야 난 비로소 깨달았다, 천체관측은 학문이 아닌 취미로 즐겨야 하는 것이라고.

 나의 과거와 만나게 해준 소년은 천체관측이 아닌 천문학을 하려고 한다. 목표는 Y대 천문우주학과란다. 부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의 나와는 달리 비전이 확실해 보인다. 그 소년을 응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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