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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채사장


 나의 첫 스마트폰은 i-phone 3Gs였다. 아이폰을 쓰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팟캐스트』였다. 팟캐스트의 장점은 다양한 주제의 지식전달이 목적인 방송이 많다는 점이다. 활자로 된 책보다는 시청각자료로 지식을 얻는 것이 편했던 나는 팟캐스트로 관심있는 분야의 지식을 많이 얻었는데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지대넓얕』도 그런 팟캐스트 방송 중 하나였다. 인문학이 주제인 것은 대략 분류를 보고 짐작했다. 하지만 『이이제이』나 『나는 꼼수다』등을 듣느라고 지대넓얕은 구독['청취'가 맞겠지만 팟캐스트에서는 '구독'으로 표현하기에 그들의 표현을 따르겠다.]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지대넓얕은 40여일의 시간차를 두고 두 권의 책으로 발간이 되었다. 팟캐스트에서 본 방송이 책으로 나왔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기숙사에 사는 회사후배가 이 책을 가지고 있어서 빌려보게 되었다.

 앞서 밝혔다시피,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권은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를 다루고 있고, 2권은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를 다루고 있다. 전자는 작가가 『현실 세계』 편이라고 이름 지었고, 2권은 『현실 너머』 편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책은 각각의 주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순서대로 읽는게 이해가 편하게 구성되어 있다. 아니, 순서대로 읽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또 꼭 필요한 개념이 아니라면 전문 용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나무보다는 숲을 볼 수 있도록 쓴 책이다.

 1권은 시작에 앞서 작가는 직선적 시간관과 원형적 시간관을 설명하고, 전자의 역사관인 직선적 역사관을 채택하여 책을 쓴다고 밝혔다. 즉,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보적인 방향으로『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를 해석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그렇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어야만 한다.]. 또 하나의 다른 특징은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단순화하여 설명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역사』파트에서는 농업혁명이 일어난 원시 공산주의부터 1991년 냉전시대가 종식되고부터 나타난 신자유주의까지 변화를 생산수단(토지→장원→공장과 자본)을 가진 지배층(왕→영주→부르주아)와 그렇지 못한 피지배층(노예→백성→프로레타리아)의 변화로써 아주 단순하게 설명했다.

 다음으로 『경제』파트에서는 시장의 자유도를 가지고 경제체제를 나누었다. 시장의 자유도가  감소함 즉, 정부의 개입이 강해짐에 따라 초기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 수정(후기)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로 나누었으며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체제 보다는 정치체제에 더 가깝다고 설명하면서, 성장과 분배의 관계도 빼놓지 않았다.

 『정치』파트에서는 우선 정치 체제를 이해하려면 경제 체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밝히고, 시장의 자유를 중시할수록 보수(우익), 정부의 개입을 중시할수록 진보(좌익)으로 정의했다. 아울러,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의 정당, 대중매체(언론과 방송), 경제집단(기업), 사회집단 등을 극우에서부터 중도를 거쳐 극좌로서 나누었다. 또,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와 엘리트 독재를 비교설명했으며, 거기에 경제체제인 자본주의와 공산(사회)주의를 결합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까지 설명했다. 끝으로 우리나라가 보수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이 부분에서 작가는 크게 세가지의 요소로 1. 역사적 경험 2. 교육의 문제 3. 대중의 비합리적 선택으로 보았다. 나도 크게 공감을 하였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휴전국가라고 해도 북한에게 이길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해도 당할 수준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로 선출된 독재자의 자리를 보수가 차지하는 이유는 독재-자본주의 시절의 교육때문이 아직까지 기성세대의 무의식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세번째 요소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비극이 바로 박근혜정부의 출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419 혁명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이은 촛불탄핵으로 선거로 선출된 정의롭지 못한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쾌거를 이뤄냈으니, 다음정권은 정의롭고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정부가 탄생하길 바란다.].  

 『사회』파트에서는 크게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로 나누었다. 이것들이 극단화가 되면 각각 이기주의와 전체주의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히틀러를 예로 들면서 이기주의보다는 전체주의가 더 위험하다고 했다. 아울러, 전체주의에서 개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자연권(우리나라 경우에는 대표적으로 헌법 제 10조, 행복추구권이 있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미디어는 광고의 수익을 통해 유지가 되는데 그것은 독재인 경우에는 정부, 민주주의에서는 기업에서 나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끝으로 『윤리』파트에서는 윤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전자는 절대적인 입장인 칸트의 의무론과 상대적인 입장인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가 있고, 후자는 결과보다는 과정의 공정성을 중시하는 하이에크와 부지의 베일을 예로 들면서 최수소혜자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롤스가 있다.

 이렇게 『현실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40여일 후에 2권이 발간된다. 2권은 현실 너머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루는 내용은 바뀌었지만 형식은 1권과 마찬가지로 대체적으로 『시간의 흐름』과 『이분법』을 사용하였다. 2권의 소제목에 알 수 있다시피 처음 주제인 철학인데 이를 논의하기에 앞서 『진리』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진리의 속성을 절대성, 보편성, 불변성의 세가지 속성으로 정의하며 이를 보는 관점을 크게 네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있다.' 둘째는 '없다.' 셋째는 '모르겠다.' 넷째는 '상관없다.'이며 이는 각각 절대주의, 상대주의, 불가지론, 실용주의로 대응됐다. 그 중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작가는 진리는 역사가 원시, 고대, 중세, 근대로 변함에 따라서 자연신, 신화, 유일신, 이성으로 변화하다가 이성의 붕괴로 인해 현대에는 반이성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화했다고 서술했다. 

 가정먼저 『철학』파트가 등장한다. 철학에서 진리를 보는 입장은 크게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로 나누었다. 철학의 시작은 고대 아테네의 회의론자이자 궤변가인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산파법을 통해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제자 플라톤은 본질적이고 영원한 이데아를 제시했다. 반면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만큼 눈에 보이는 현실의 존재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만들려면 재료가 필요한데 재료와 형상은 상대적 것이어서 형상은 없고 가능성만이 존재하는 것을 제일질료라고 했고, 이는 인간의 사고에만 존재한다고 했다. 반대로 어떠한 질료도 없는 궁극의 형상을 순수형상이라고 했으며 구체적으로는 신이다. 신은 질료가 없으므로 현상세계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모든 질료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적이 된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순수형상 보다는 질료가 형상으로 나아가는 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으므로 상대주의로 보는게 더 타당하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이 그리스도교 교리를 플라톤의 사상에 대입했다. 신플라톤주의의 일자를 야훼에, 이데아 세계를 천국에, 그림자를 지상으로 대입했다. 따라서 교부철학은 절대주의이다. 이어서 스콜라철학이 등장하는데 보편논쟁으로써 실재론(개인적인 것보다 앞서는 보편이 존재함)과 유명론(개인적것이 모여있을 뿐 보편이란 없음)의 두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절대주의에 가깝고 후자는 상대주의에 가깝다. 한편, 중세에는 그리스도교가 서양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회의주의는 비주류로서 거의 발전이 없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실재론은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로 유명한 데카르트의 합리론으로 발전하고 이는 보편적 이성에서 출발하는 연역법으로 나타난다. 유명론은 '우상론'으로 유명한 베이컨의 경험론으로 발전하고 이는 개별적 경험에서 출발하는 귀납법으로 나타난다. 또, 입장과는 별개로 중세까지는 진리가 있다, 없다로 보는 존재론으로 접근을 했다면, 근대부터는 진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존재론으로 접근을 했다.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모두 아우르는 관념론을 주장했다. 칸트는 눈앞에 드러난 세계를 현상이라고 하고, 현상 너머 진짜 세계를 물자체라 불렀다. 그는 물자체 세계는 절대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사고체계가 같기 때문에 동일한 세계를 본다고 했고, 사고의 체계가 같다는 주체의 판단형식은 시간과 공간의 감성형식과 12개의 지성형식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했다. 이러한 칸트의 관념론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으로 발전한다. 한편, 니체는 좋음과 나쁜,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한다면서 그리스교도 때문에 나쁨이 선이 되고 좋음이 악이 된 병든 사회를 비판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초인사상과 영원회귀를 주장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하이데거는 인식론에서 다시 존재로 회귀해서 존재함은 드러나 있다로 귀결하면서 작가는 절대주의로 분류했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해서 탐구했는데,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고 했다. 전기는 경험론(상대주의)에 가깝지만 후기에는 회의주의에 가깝다고 정의했다. 끝으로 실존주의를 다뤘다. 실존주의자는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본질과 존재로 나누는데, 의자의 본질은 앉는 것이고 실재는 물건이다. 돼지의 본질은 먹는 것이고 실재는 동물이다. 이들은 모두 본질이 실재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보다는 실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국가, 사회 관습등 인간에게 씌어진 여러 규정과 억압, 본질을 벗어내고 나면 남는것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포스트모던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작가는 말했다.

 『과학』파트도 철학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보는 입장을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로 나누었다. 먼저 고대는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동설, 근대는 코르페니쿠스와 갈릴레의 지동설이 각각의 시작이라고 말했는데, 코르페니쿠스는 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했지만 길랄레이는 수학적 관점에서 접근 했기에 과학의 아버지로 평가된다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수학은 일반적인 언어와는 달리 문화에 의해서 표현이 달져도 동어반복이기에 내적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즉, 언제나 참이기 때문에 그 결과도 참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수학은 인간이 찾아낸 학문중에서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했다. 또 과학은 과학적 관찰(경험론)과 수학적 근거(합리론)를 모두 병행하기 때문에 과학이 진리에 가장 가까워 보인다고 했다. 또 데카르트가 공간을 표현하는 기하학과 방정식과 같은 대수학을 좌표평면을 이용해서 해석기하학으로 연결했다. 이로서 기하학의 대상인 존재자가 해석기하학을 통해서 대수학으로써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뉴턴은 이를 이어받아 존재자와 존재자의 사이의 관계, 즉 만유인력이라는 힘을 2차원의 기하학인 유클리드 기하학을 이용해서 수학적으로 표현고 이는 뉴턴역학이라 불린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역학에서 한발 더 나아가 불변이라고 여기던 시간과 공간은 관측자의 속도(등속)에 따라서 상대적이며, 특히 가속도는 결국 중력과 같다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했다. 따라서 질량을 가지는 물체는 중력이 있기에 시공간의 곡률이 생긴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3차원의 기하학인 리만 기하학에서 전개되는 물리학이라고 했다. 이처럼 갈릴레이-뉴턴-아이슈타인으로 발전된 물리학은 인과법칙을 따르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갖는다. 따라서 과학은 절대주의적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듯했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과학에서도 상대주의가 나타났다. 고전역학에서는 물리량인 위치나 속력에 의해 존재자의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측정이 불가능하며, 관측을 하면 비로소 존재자는 위치와 속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정말 비과학적인 말인것 같지만 전자는 수학적 확률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서술되고, 후자는 이중슬릿에 의한 간섭실험으로 확인 된다고 했다. 과학도 절대주의 안에서 상대주의가 나타났다. 끝으로 회의주의는 과학철학에서 나타나는데, 쿤에 의하면 과학의 발전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단지 정치적 권력 투쟁에 의한 결과라고 말했다.

 다음은 철학과 과학에 이어 진리의 후보로 『예술』을 거론했다. 예술 또한 크게 세가지로 나뉘는데, 이성을 통해 그림을 그리려는 고전주의는 조화, 균형, 비례, 법칙 등을 강조하기 때문에 절대주의적 측면을 가진다고 했다. 개인의 내면과 개성을 존중하는 낭만주의는 상대주의적 측면이 갖고, 현대예술은 너무 폭이 넓어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과거의 예술을 해체를 근간으로 하기에 회의주의적이라고 했다. 이어서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미술, 중세의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 로마네스크, 고딕에 이어 르네상스 양식까지 절대주의라고 정의했으며, 르네상스에서 파생되어 나온 바로크와 로코코는 상대적으로 감성이 중시되었기에 상대주의로 분류했다. 이어서 초기 근대미술은 다시 고전으로 돌아려는 신고전주의가 시작되어 절대주의로 돌아갔다가 다시 오브제의 내면을 중시한 낭만주의로 바뀌면서 상대주의로 바뀌었다. 그 후, 오브제가 역사적인 영웅이나 귀족 등에서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 등의 일상으로 바뀌면서 후기 근대미술로 접어들었다.  후기 근대미술에는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사실주의가 있는데, 이는 절대주의에 가깝지만 정치적 이념(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도구로써 사용되었기에 배제했다. 한편, 인상주의는 한 발 더 나아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일상적인 삶과 자연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가감없이 그릴려고 했다. 인상주의는 입체파와 추상미술로 발전하여 과거의 예술들을 해체하면서 현대미술의 시대를 열었다. 특히 추상미술을 감상할 때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도한다는 점과 예술의 대상, 주체, 의미 중에 무엇을 흔들고 있는지 보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영역의 마지막으로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종교는 크게 절대적 유일신교와 상대적 다신교로 나누었다. 전자는 구약에 기인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있고 후자는 베다를 기원으로 하는 힌두교, 불교, 티베트 불교가 있다. 절대적 유일신교에서는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신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반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은 같다고 했다.  상대적 다신교에서는 인간이 중심이며 절대적인 전체인 브라마흐와 개채로서의 절대적인 아트만이 하나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다만 불교는 힌두교와는 달리 비현실적인 가르침보다는 현실의 고통을 제거하는데 집중해야한다고 했다. 세부적인 차이는 달라도 개인의 수행과 정진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했다. 한편, 종교는 회의주의적 태도는 철학과 과학의 영역에서 발견될 뿐, 종교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끝으로 작가는 이 책의 마지막 파트인 『신비』는 대화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하고 크게 죽음과 삶으로 나누었다. 죽음은 다시 죽음의 순간인 임사체험과 죽음 이후인 사후 가능성으로 나누어 이야기했다. 후자는 통시적 삶과 공시적 삶으로 나누었는데, 통시적 삶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에 대한 내용이고 공시적 삶은 의식에 대한 내용을 다뤘고 그것을 확장하여 의식 너머의 세계까지 다루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제목 그대로 큰 깊이감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만큼의 넓고 방대한 부분을 다뤘다. 1권에 비해 2권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필요없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1권 못지않게 아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문학자는 우리나라는 철학이 없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 국민이 철학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철학이 없으면 부모님 세대가 열심히 살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세대가 아파하지도 않을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실용주의만이 남아있다. 그것이 실용주의인지도 모른채로 말이다. 그래서 깊이가 있는 실용주의가 아니다. 그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일차원적인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정치, 사회체제는 서양, 정확히는 서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받았다. 서양의 물질세계를 오롯이 받아들여서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어 절대적인 빈곤에서 탈출하여 나아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기 일보직전까지 왔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한걸음을 내 딛는 것이 지금까지 내 딛어온 걸음보다 더 힘들수가 있겠다란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는 지금 진리나 가치관 같은 정치적 철학이 없는 사춘기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건국하기 전에 존재했던 나라, 조선. 조선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제국이라는 (우리보다 하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외국에 의해 망했고, 근 40여년 동안 그들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해방 후에는 힘이 없어서 외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그 때문에 조선은 현대인들에게 실패한 나라로 각인되어 있고 그들의 정치철학인 유교, 정확히 말하면 성리학은 윤리나 예의 수준에서만 계승했고 나머지는 부정하고 버려졌다. 분단 뒤, 힘 없는 설움을 알았기에 열심히 힘을 길러 현재의 상태에 왔다. 그런데 너무나 앞만 보고 달려와서 독재가 독재인지도 모르고, 진보는 무조건 빨갱이로 몰려 정치적 생명을 잃었으며 심지어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줘야할 법에 의해서 생명자체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인지 알았던 국민들은 자본주의에도 독재가 있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 투쟁해서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하지만 되찾아온 제도를 꾸려나갈만한 양질의 철학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개개인이 삶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분명히 우리만의 철학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이 책은 그 시작의 첫단추로써, 주춧돌로써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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